오카쿠라텐신은 페노로사의가르침을 바탕으로 일본미술에 눈을 뜹니다.

오카쿠라 텐신 기념공원(평소에 육각당의 문은 닫혀 있습니다.)

오카쿠라 텐신 기념공원
 

오카쿠라 텐신 (이바라키현 텐신 기념 이즈라 미술관 소장)

 
오카쿠라 텐신(오카쿠라 카쿠조, 1863-1913)은 요코하마 태생으로 도쿄 가이세이 학교(현 도쿄대학)에서 공부하면서 강사였던 페노로사의 미술론에 큰 영향을 받아 문부속을 거쳐 페노로사와 함께 서양 미술시찰에 파견되어 메이지 23년(1890)에 도쿄 미술학교 초대 교장인 하마오 아라타에 이어 2대 교장이 되었습니다. 페노로사를 비롯해 구로카와 마요리, 하시모토 가호, 다카무라 코운, 가와바타 교쿠쇼, 고세 쇼세키, 카리노 나츠오 등을 교원으로 영입하여 실질적인 학교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그 후에 서양화과, 도안과에는 구로다 세이키, 후지시마 타케지, 와다 에이사쿠, 오카다 사부로스케 등이 교원으로 부임했습니다. 텐신은 메이지 31년(1898)에 학교를 떠나 하시모토 가호, 요코야마 다이칸, 시모무라 칸잔, 히시다 슌소 등과 함께 일본 미술원을 결성했습니다. 이러한 경위는 당시의 일본이 동양 전통에 대한 당착과 서양의 새로운 물결 사이에서의 갈등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술 학부 구내에 오카쿠라를 기념하여 설치된 육각당에는 히라구시 덴츄가 제작한 「오카쿠라 텐신 상」이 놓여있습니다.
오카쿠라 텐신 기념공원은 도쿄 미술학교를 함께 사임한 요코야마 다이칸 등과 설립한 일본 미술원 자취를 다이토구가 기념하여 공원으로 쇼와 42년(1967)에 개원했습니다. 원내에는 오카쿠라 텐신을 기념한 육각당이 건립되고 공원 안에는 히라구시 덴츄의 작품인 텐신좌상이 놓여있습니다. (다이토구 야나카 5-7-10)

문화탐방의 도쿄 예술대학 페이지
 
히라구시 덴츄 「오카쿠라 텐신상」(도쿄 예술대학 소장)
 

다이토구 야나카(구 야나카 하츠네쵸)에 있는 텐신의 저택터는 일본 미술원의 자취로서 「오카쿠라 텐신 기념공원」이 되었습니다. 벚꽃의 계절에는 분홍빛이 육각당을 물들입니다.
 
일본 미술원 터의 야나카 꾀꼬리의 비

텐신이 즉흥으로 읊은 시가 요코야마 다이칸의 필체로 새겨져 있습니다. 시와 함께 꾀꼬리와 홍매의 그림이 있습니다.
 
 谷中鶯 初音の血に染む 紅梅花
 堂々男子は死んでもよい
 奇骨侠骨 開落栄枯も 何のその
 堂々男子は死んでもよい
 
 야나카 꾀꼬리 첫울음의 피로 물든 홍매화 꽃
 당당한 남아는 죽어도 좋으리 
 기골협골 개락영고도 무엇인들
 당당한 남아는 죽어도 좋으리

 오카쿠라 텐신(1863-1913)은 도쿄 미술학교(현 도쿄 예술대학)의 2대 교장으로 미술학교 설립에 힘을 쏟고 나중에는 일본 미술원을 설립하였으며, 보스턴 미술관 중국/일본 미술부장으로서 일본 미술에 대한 소개와 계몽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에도 막부 말기의 분큐 2년(1863) 해외로 열려 있는 요코하마에서 태어난 텐신은 모친 사망 후에 머무르던 쵸엔사에서 한서를 공부하고 어학당에서 영어를 습득하여, 어학을 바탕으로 어네스트 페노로사(1853-1908)의 조수로 일본 미술품을 수집한 경험이 이후의 국제인으로서의 텐신 그리고 일본과 동양 미술계의 태두로서의 자질 형성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메이지 유신의 혼란과 폐불훼석 운동에 의해 지금까지 돌아보지 않았던 일본의 미술품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진행하여 그 가치를 해외에 전파한 페노로사는 이후의 일본 미술 부흥에 가장 기여한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문부성 도화 조사회의 지시로 페노로사는 텐신과 함께 옛 사원들의 보물 조사를 실시하여, 호류사 몽전(팔각원당)을 조사한 경험의 흔적은 이후 텐신 자신이 연 육각당(간란테이)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일본 미술원 설립 당시의 신문기사 및 사진
 
텐신의 도쿄 미술학교 교장의 사직과 이에 동조한 미술학교 교원들에 관한 소동은 놀라운 일로서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메이지 31년(1898)의 일본 미술원 설립에는 재계, 정부, 그리고 미국으로부터 기부가 모였습니다. 개소식 사진에는 하시모토 가호, 텐신을 비롯해 다이칸, 슌소 등의 모습도 보입니다.

히라구시 덴츄 「고호쵸진」(이즈라 낚시꾼, 쇼와 37년(1962) 작)
 

일본 미술원이 경영난에 빠진 후 메이지 39년(1906), 텐신은 미술원을 ‘동양의 바르비종’으로 간주한 이바라키현 이즈라(현 기타이바라키시 이즈라)로 옮겼습니다. 텐신을 따르던 요코야마 다이칸, 히시다 슌소, 시모무라 칸잔, 기무라 부잔 등은 그곳에서 어려운 시기를 보냈지만 이후에 일본 미술의 새로운 작풍을 개척하였습니다. 이즈라에 거처를 옮긴 텐신은 국내외를 바삐 오가는 한편, 이즈라의 자택에서 휴식을 취하며 낚시에 몰두하여 스스로를 ‘이즈라 노인’, ‘고호쵸진(이즈라 낚시꾼)’이라고 칭했습니다. 텐신을 존경하던 히라구시 덴츄는 반복해서 「고호쵸진」을 제작했습니다. (이바라키대학 이즈라 미술문화 연구소 소장)

히라구시 덴츄 「오카쿠라 텐신상」(다이토구 텐신 기념공원)
 

 
육각당에 놓인 히라구시 덴츄가 제작한 「오카쿠라 텐신상」은 텐신의 일본 미술 조예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함 동시에, 덴츄의 텐신에 대한 존경이 여실히 표현되어 있습니다. 텐신은 동경 미술학교 교복으로 삼았던 법복을 걸치고 있습니다.
 

동일본 대지진 부흥 지원영화 「텐신」의 촬영지가 된 이바라키현 이즈라의 이즈라미사키공원


이바라키현 이즈라미사키공원에서는 헤세이 25년(2013)에 제작 공개된 부흥 지원영화 「텐신」(마츠무라 카츠야 감독, 다케나카 나오토 주연)의 촬영이 이루어져 지금은 없는 일본 미술원 건물이 복원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다이토구에서의 개봉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상영되었습니다.

 

영화 「텐신」
오카쿠라 텐신 (이바라키현 텐신 기념 이즈라 미술관 소장)

 
오카쿠라 텐신(오카쿠라 카쿠조, 1863-1913)은 요코하마 태생으로 도쿄 가이세이 학교(현 도쿄대학)에서 공부하면서 강사였던 페노로사의 미술론에 큰 영향을 받아 문부속을 거쳐 페노로사와 함께 서양 미술시찰에 파견되어 메이지 23년(1890)에 도쿄 미술학교 초대 교장인 하마오 아라타에 이어 2대 교장이 되었습니다. 페노로사를 비롯해 구로카와 마요리, 하시모토 가호, 다카무라 코운, 가와바타 교쿠쇼, 고세 쇼세키, 카리노 나츠오 등을 교원으로 영입하여 실질적인 학교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그 후에 서양화과, 도안과에는 구로다 세이키, 후지시마 타케지, 와다 에이사쿠, 오카다 사부로스케 등이 교원으로 부임했습니다. 텐신은 메이지 31년(1898)에 학교를 떠나 하시모토 가호, 요코야마 다이칸, 시모무라 칸잔, 히시다 슌소 등과 함께 일본 미술원을 결성했습니다. 이러한 경위는 당시의 일본이 동양 전통에 대한 당착과 서양의 새로운 물결 사이에서의 갈등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술 학부 구내에 오카쿠라를 기념하여 설치된 육각당에는 히라구시 덴츄가 제작한 「오카쿠라 텐신 상」이 놓여있습니다.
오카쿠라 텐신 기념공원은 도쿄 미술학교를 함께 사임한 요코야마 다이칸 등과 설립한 일본 미술원 자취를 다이토구가 기념하여 공원으로 쇼와 42년(1967)에 개원했습니다. 원내에는 오카쿠라 텐신을 기념한 육각당이 건립되고 공원 안에는 히라구시 덴츄의 작품인 텐신좌상이 놓여있습니다. (다이토구 야나카 5-7-10)
 

문화탐방의 도쿄 예술대학 페이지 

 

히라구시 덴츄 「오카쿠라 텐신상」(도쿄 예술대학 소장)

 

다이토구 야나카(구 야나카 하츠네쵸)에 있는 텐신의 저택터는 일본 미술원의 자취로서 「오카쿠라 텐신 기념공원」이 되었습니다. 벚꽃의 계절에는 분홍빛이 육각당을 물들입니다.

 

일본 미술원 터의 야나카 꾀꼬리의 비
텐신이 즉흥으로 읊은 시가 요코야마 다이칸의 필체로 새겨져 있습니다. 시와 함께 꾀꼬리와 홍매의 그림이 있습니다.
 
 谷中鶯 初音の血に染む 紅梅花
 堂々男子は死んでもよい
 奇骨侠骨 開落栄枯も 何のその
 堂々男子は死んでもよい
 
 야나카 꾀꼬리 첫울음의 피로 물든 홍매화 꽃
 당당한 남아는 죽어도 좋으리 
 기골협골 개락영고도 무엇인들
 당당한 남아는 죽어도 좋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