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코야마 다이칸이 남긴 명작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탄생했습니다.

요코야마 다이칸 기념관

요코야마 다이칸 기념관

다이칸(1868-1958)은 메이지, 다이쇼, 그리고 쇼와 시대를 살아간 일본 화단의 태두로서 수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다이토구의 첫 명예 구민이 되었습니다. 시노바즈노이케에 인접한 다이토 구 이케노하타 기념관은 일본 미술계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다이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사저를 공익 재단법인 요코야마 다이칸 기념관으로 공개 운영하고 있습니다. 또한, 본 기념관은 헤이세이 6년(1994)에 「히타치노쿠니 요코야마 다이칸 기념관」으로 다이토구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헤이세이 28년(2016) 11월에 「요코야마 다이칸 고택 및 정원」으로써, 다이칸이 직접 지시해서 지어졌다는 점과 다이칸의 사상 및 감성이 반영되어있다는 점, 그리고 다이칸의 창작의 장소가 되었다는 점이 평가받아 국가의 사적/명승 지정을 위한 절차가 시작되었습니다. (다이토구 이케노하타 1-4-24)

요코야마 다이칸 기념관 홈페이지
 

요코야마 다이칸 기념관의 정원은 보전을 위해 출입이 금지되고 있습니다.
관내의 작품 전시는 수시로 변경됩니다.

 

横山大观

다이칸은 오카쿠라 텐신이 남긴 ‘일체의 예술은 무궁(영원)을 좇는 것이다. 예술이란 감정을 토대로 세계 최고의 정취를 표현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아 많은 명작을 남겼습니다. (요코야마 다이칸 기념관 ‘다이칸의 말’ 발췌)

고택은 쇼와 20년(1945) 폭격으로 전소하고 그 후 쇼와 29년(1954)에 재건되었습니다. 거실로 사용된 ‘쇼코도’에는 큰 유리창이 있고 창을 통해 넓은 정원을 배경으로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쇼코도’는 이바라키현 이즈라에 있던 다이칸의 거처 인근의 해변에 있던 동굴로, 밀물 때는 바위틈에서 찰박찰박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다이칸은 이즈라에서의 생활을 그리며 이름을 붙였습니다.

 요코야마 다이칸은 메이지 원년(1868)에 미토의 무사가문인 사카이 스테히코의 장남, 사카이 히데마로로 태어났습니다. 메이지 유신으로 번제도가 폐지되면서 무사로서의 신분을 잃은 아버지를 따라 메이지 11년(1878)에 상경했습니다. 유시마 소학교를 거쳐 도쿄부 중학교(현 히비야 고등학교)로 진학하고 메이지 18년(1885)에는 건축가가 되고자 도쿄 대학 예비문에 응시했지만, 중복 수험으로 수험규칙에 어긋나면서 실격되어 도쿄 영어학교에 입학하고 영어를 공부했습니다. 이후 메이지 21년(1888) 도쿄 미술학교(현 도쿄 예술대학)가 개교되면서 1기생으로 입학했습니다. 그 무렵에 요코야마 가의 양자가 되면서 요코야마 히데마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약관 29세에 도쿄 미술학교의 제2대 교장으로 취임한 오카쿠라 텐신을 만나 평생의 스승으로 삼게 됩니다. 졸업 후에는 제실 박물관 (현 도쿄 국립박물관)에 근무하고 교토 시립 미술공예 학교(현 교토 시립예술대학) 교사를 거쳐 동경 미술학교 도안과 조교수가 되면서 다이칸이란 호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메이지 31년(1898)의 도쿄 미술학교의 내분으로 텐신이 사임하면서 함께 나와 일본 미술원 창설에 참여하였습니다. 메이지 36년(1903)에 인도를 돌아보고 이듬해 37년(1904)에는 텐신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각지에서 전시회를 개최했습니다.
 메이지 39년(1906), 텐신은 ‘동양의 바르비종’이라 칭하면서 연구소(현 이바라키 이즈라 미술문화연구소)를 이바라키현 오오츠무라 이즈라(현 기타이바라키시)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제자인 시모무라 칸잔, 히시다 슌소, 기무라 부잔, 그리고 다이칸을 불러 새로운 일본화의 창조를 목표 삼았습니다. 이즈라에서의 생활은 어려웠으며, 메이지 40년(1907)에는 아버지 스테히코가 타계하고 이어 스승이었던 하시모토 가호도 서거하고 이즈라의 집도 화재로 소실되면서 잠시 우에노 이케노하타 시치켄쵸에 머물다가 메이지 42년(1909)에 이케노하타 가야마치(현 기념관)의 땅에 터를 잡았습니다. 그 후 다이쇼 2년(1913)에 텐신도 서거했습니다.
 다이칸은 제작에 전념하고 문전, 제전에 연달아 출품하면서 다이쇼 11년(1922)에는 프랑스의 살롱에 출품하여 회원으로 추대되었습니다. 나아가 쇼와 5년(1930)에는 로마에서 개최된 일본 미술전에 작가대표로 추대되면서, 쇼와 12년(1937)에 제1회 문화훈장, 쇼와 22년(1947)에 문화공로장을 수상하고 제국 예술원 회원도 역임했습니다. 평생 일본 화단을 이끌면서 쇼와 33년(1958)에 89세로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영봉비학」 (쇼와 28년(1953) 요코야마 다이칸 기념관 엽서에서 전재)

 다이칸의 작풍은 전통적인 일본화의 선묘법에 반해, 서양 미술, 그리고 동양 미술에도 조예가 깊었던 텐신의 지도로 영국의 콘스타블, 쿠르베와 코로 등의 프랑스 바르비종파와 인상파와 같은 이른바 외광파의 영향을 받아 선을 흐리는 몰선묘법으로 변화해갔습니다. 당시 비평가들은 이런 표현을 몽롱체라고 평했습니다. 이 표현 기법은 다이칸 작품의 특징이 되어 일본화에 혁신을 가져왔습니다. 젊은 날의 작품부터 쇼와에 이르는 작품군을 통해 그 변화를 읽을 수 있습니다.


 
제10회 원전 출품작품 「생생유전(습작, 다이쇼 12년(1923))」
 

 생생유전은 40m 남짓에 달하는 수묵화의 대작으로 만물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모습을 비유하여 대기에서 맺힌 한 방울의 물이 강을 이루고, 바다로 흘러, 이윽고 용으로 변해 승천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요코야마 다이칸 기념관

다이칸(1868-1958)은 메이지, 다이쇼, 그리고 쇼와 시대를 살아간 일본 화단의 태두로서 수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다이토구의 첫 명예 구민이 되었습니다. 시노바즈노이케에 인접한 다이토 구 이케노하타 기념관은 일본 미술계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다이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사저를 공익 재단법인 요코야마 다이칸 기념관으로 공개 운영하고 있습니다. 또한, 본 기념관은 헤이세이 6년(1994)에 「히타치노쿠니 요코야마 다이칸 기념관」으로 다이토구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헤이세이 28년(2016) 11월에 「요코야마 다이칸 고택 및 정원」으로써, 다이칸이 직접 지시해서 지어졌다는 점과 다이칸의 사상 및 감성이 반영되어있다는 점, 그리고 다이칸의 창작의 장소가 되었다는 점이 평가받아 국가의 사적/명승 지정을 위한 절차가 시작되었습니다. (다이토구 이케노하타 1-4-24)
 


요코야마 다이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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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야마 다이칸 기념관의 정원은 보전을 위해 출입이 금지되고 있습니다.
관내의 작품 전시는 수시로 변경됩니다.

 
 
 
 
 
 
 
 
 
 
 
 
 
 
 
 
 
 
 
 

다이칸은 오카쿠라 텐신이 남긴 ‘일체의 예술은 무궁(영원)을 좇는 것이다. 예술이란 감정을 토대로 세계 최고의 정취를 표현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아 많은 명작을 남겼습니다. (요코야마 다이칸 기념관 ‘다이칸의 말’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