糸瓜咲て痰のつまりし仏かな 子規  수세미 꽃이 피어도 담이 끓으니 얼마 남지 않았는가 시키

처마 끝에 매달린 수세미에서 시키가 떠나며 남긴 글귀가 떠오릅니다.
마사오카 시키 (국립 국회도서관 소장)
 

 마사오카 시키(본명 츠네노리, 1867-1902)는 게이오부터 메이지 시대를 살았던 하이쿠, 시인, 어학의 연구자입니다. 하이쿠와 단가를 비롯하여 수필, 소설, 신체시, 한시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활동하면서 일본 근대문학을 개척한 선구자입니다. 메이지 22년(1889)에 피를 토한 자신을 입이 붉은 이유로 울면서 피를 토한다고 일컬어지는 두견새에 비유하여 시키(자규: 두견새, 호토토기스)라 칭했습니다. 신문 기자로 재직하면서 메이지 30년(1897)에는 하이쿠 잡지 「호토토기스」를 창간하고 자신도 하이쿠를 읊으며 단가의 혁신을 시도하고 수필의 집필과 함께 요사 부손 등 앞선 문인들의 연구에도 힘써 근대 문학에 크게 공헌했습니다.
 시키암은 모친인 야에와 여동생 리츠와 함께 지내면서 34세 11개월의 생애를 마감한 거처입니다. 메이지 27년(1894) 2월에 이주한 셋집(구 가가번 마에다 가문의 별저 내)은 쇼와 20년(1945) 4월 제2차 세계대전의 공습으로 소실되었지만, 쇼와 25년(1950)에 사무카와 소코츠 등의 노력으로 거의 당시의 모습으로 복구되어 지금에 이릅니다. (다이토구 네기시 2-5-11)

 
 

 시키암은 JR 우구이스다니역 북쪽 출구에서 도보로 5분, 빌딩과 호텔이 밀집한 구역을 지나서 네기시 2쵸메에 있습니다. 시키는 이곳에 메이지 27년(1894)에 옮겨와 메이지 35년(1902) 9월 19일에 세상을 뜰 때까지 거주했습니다. 시키는 자신을 달제 책방 주인, 대나무 촌민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시키 사후에 여동생인 리츠가 이어서 모친인 야에와 함께 지냈습니다. 리츠 사후(1941)에는 문하생인 사무카와 소코츠가 시키암을 지켰습니다. 쇼와 25년(1950)에 재건되어 쇼와 27년(1952)에 도쿄도 지정사적이 되었습니다. 현재는 당시의 약 2배(405.6 제곱미터)의 면적이 되었습니다. 골목을 낀 건너편에는 메이지 27년(1894)에 시키를 만나 신문 「소일본」의 삽화를 담당한 이래 친구가 된 서양화가이자 서예가인 나카무라 후세츠의 옛 집터(서예 박물관)가 있습니다. 후세츠는 메이지 32년(1899)에 시키가 채색화를 그리고 싶다 하여 수채화 도구를 가져왔고, 시키는 이것으로 「과일첩」이나 「풀꽃첩」등의 작품을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그렸습니다.

 

 
 
 
 

시키 거사 자화초상(메이지 33년(1900), 국립 국회도서관 소장)
 
 
  

우에노 공원 마사오카 시키 기념구장에 세워진 시비인 「봄바람이여 공을 던진 푸른 벌판」이 시키가 공을 던지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시키가 병상에 누워 있던 작은 방에서는 유리창 너머로 지금도 변함없이 한 아름 열린 수세미 시렁의 푸른 풍경이 보입니다.

 마사오카 시키(츠네노리)는 게이오 3년(1867)에 이요쿠니 온센군 후지와라 신마치(현 에히메현 마츠야마시 하나조노쵸)에서 마츠야마 번사인 마사오카 츠네히사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모친인 야에는 마츠야마 번의 유학자로서 번교 명교관의 교수인 오하라 칸잔의 장녀였습니다. 시키는 메이지 5년(1872)에 부친이 사망하면서 마사오카 가문을 이어받아 숙부인 카토 츠네타다와 오하라 츠네노리의 후견을 받고 자랐습니다.
 메이지 13년(1880), 마츠야마 중학교(현 마츠야마히가시 고등학교)에 입학하지만, 메이지 16년(1883)에 자퇴하고 상경해 수험 공부를 위해 공립학교(현 카이세이 고등학교) 등에서 공부했습니다. 이듬해인 17년(1884)에 도쿄대학 예비문(후에 제 1 고등중학교로 개칭 · 현 도쿄대학 교양학부)에 입학했습니다. 메이지 18년(1885), 시키가 18세의 여름에 귀성했을 때 마츠야마 중학교 1년 후배의 아키야마 사네유키를 통해 이데 마사오에게 시를 배우고 같은 해에 하이쿠도 짓기 시작했습니다. 아키야마 사네유키는 시키의 상경에 자극을 받아 마츠야마 중학교를 중퇴하고 같은 해에 도쿄대학 예비문에 입학했습니다. 이후에 경제적인 이유로 예비문을 수료하고 해군 사관학교로 진학하여 해군 중장으로 러일 전쟁에서 활약했습니다. 시키와는 길을 달리했지만, 평생지기로 남았습니다.
 


제1 고등중학교 시절의 시키(20세, 시키암 기탁자료)
 

 메이지 21년(1888) 여름에 무코지마 쵸메이사 경내에 있는 떡집 야마모토야의 2층을 ‘월향루’ 라 칭하고 하숙을 하면서 문학청년답게 문집 「나나쿠사슈」를 집필하는 동안, 하숙집 딸과의 풋풋한 연애의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이듬해 22년(1889) 1월에는 동급생인 나츠메 소세키와의 교류가 시작되면서 게이오 3년(1867) 2월 9일 에도 우시고메 바바시타요코쵸(현 신주쿠구 기쿠이쵸) 태생인 소세키와 10월 14일 출생인 시키와의 교류는 평생의 우정으로 이어졌습니다. 시키는 소세키와 만난 그해 5월에 기숙사에서 갑자기 큰 피를 토하고 폐결핵으로 진단되었습니다. 그날 밤 시키는 「호토토기스」(두견새)라는 제목으로 ‘두견새야 병꽃나무를 찾아왔는가’ ‘두견새야 병꽃나무가 질때까지 울겠는가' 등 4,50 구를 읊으며 ‘시키’(두견새)라 스스로 호를 칭했습니다. 질병과의 싸움이 시작된 것입니다. 우려한 소세키는 몇몇 친구들과 시키의 병상을 문병하고 바로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병세를 염려한 소세키가 시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의 내용은 ‘그 불친절한 의사에게 진료를 받지 말고 대학 병원의 진단을 받고 하루빨리 입원하라, 그것이 모친과 국가를 위한 일이다.’ 라고 적으며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격려의 하이쿠를 담았습니다.
 
  to live is the sole end of man!
   오월 십삼일
   돌아가지 말고 울지 말고 웃어라 두견새야
   들리지 않아도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두견새야
                 킨노스케
   마사오카 대인
   귀하
   (와다 시게키편 「소세키 · 시키 왕복 서간집」이와나미 문고)
 
 메이지 23년(1890)에는 제국대학 문과 철학과에 입학(이후 국문과로 전과)했습니다. 이듬해 24년(1891) 3월에 보소 반도를 여행하면서 기행문 「카쿠레미노」를 집필하고 5월에는 가와히가시 헤키고도와의 인연으로 그의 동급생인 다카하마 쿄시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두 사람에게 하이쿠를 가르쳤습니다. 이 두 사람은 후에 시키 문하의 쌍벽으로 불리게 됩니다.
 메이지 25년(1892) 6월에 시키는 기말시험에 낙제하면서 추가 시험을 보지 않고 자퇴를 결심합니다(26년 3월 퇴학). 11월에는 어머니 야에와 여동생 리츠를 도쿄로 초청하고 12월에는 일본 신문에 입사했습니다. 가족 3명의 생활은 사주인 구가 카츠난 가택의 서쪽, 가미네기시 88번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신문사의 직원이 된 시키는 메이지 26년, 신문 '일본'에 하이쿠 란을 만들면서 하이쿠의 보급과 문예란의 확충에 본격적으로 착수했습니다. 7월 도호쿠 지역을 여행하고 「하테시라즈노키」를 「일본」에 연재했습니다. 시키가 지금의 시키암, 당시 가미네기시 82번지의 마에다 가택의 거처로 옮긴 것은 메이지 27년(1894) 2월의 일입니다.
 

 

야구복을 입은 시키(22세, 시키암 기탁 자료)
 

 시키는 메이지 19년(1886)~23년(1890) 무렵까지 야구에 열중했습니다. 우에노 공원 박물관 옆 공터에서도 경기하곤 했습니다. 시키가 기숙사의 동료와 야구를 즐긴 장소였던 유래로 헤이세이 18년(2006) 7월에 동호인 야구 등을 위한 ‘우에노 공원 마사오카 시키 기념구장’이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도쿄돔의 야구 체육박물관에는 명예의 전당에 시키의 옆모습의 부조가 있고, 야구 단가도 기념문에 새겨져 있습니다.


마지막 장소가 된 서재 겸 병상

시키가 오랫동안 요양하고 창작의 장소가 된 작은방에는 시키의 자화상(복제)이 걸려 있습니다. 유리창 너머로 수세미 시렁과 계절별 화초를 볼 수 있습니다.
 

시키의 책상(복제) 헤세이 15년(2003) 제작, 원물은 시키암 창고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시키의 수필 「차량의 봄빛」에 ‘작년(메이지 32년(1890)) 구멍 뚫린 책상을 만든 서투른 목수’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척추 카리에스로 불편한 왼쪽 무릎을 세워 책상 틈에 끼워 자세를 잡았을 것입니다. 또한, 같은 해 12월에 미닫이를 유리창으로 바꿔 햇빛이 들어 오게 되었습니다.

 


투병하는 시키. 메이지 33년(1900) 촬영
 

病む我を写す写真に床の辺の瓶にさしたる桜写りぬ 子規
앓는 나를 찍은 사진에 바닥에 있던 병에 꽂힌 벚꽃은 보이지 않는구나 시키
 


시키 생존 당시의 구조와 정원

현관을 들어선 왼편에는 옆집이 있었습니다. 옆집과 접한 정원의 동쪽에 나무 울타리, 서쪽에는 검은 칠을 한 나무 담벼락이, 남쪽에는 켄닌사 담이 있고 뒤로 이어지는 나무문이 있었습니다. 시키는 이 작은 정원에 대해 ‘우리 정원의 담 밑에 피는 장미의 꽃봉오리가 부풀며 여름은 온다’(메이지 31년(1898))라고 ​​읊었습니다.
 

메추라기 새장이 시키의 왼쪽 처마에 걸려 있습니다. (메이지 32년(1899) 촬영, 마츠야마 시립 시키 기념박물관 소장)

고조텐 신사(다이토구 우에노공원 4-17)

시키의 시비는 전국 각지에 있지만, 다이토구에도 많이 있습니다.
 
みちのくへ涼みに行くや下駄はいて 子規 (明治26年(1893))
미치노쿠로 바람을 쐬러 가자 나막신을 신고서 시키
秋風や旅の浮世の果知らず 子規 (明治26年(1893)) 
가을 바람이여 끝이 안 보이는 속세의 여정 시키

시타야 신사(다이토구 히가시우에노 3-29-8)

에도 시대인 칸세이 10년(1798) 6월에 초대 산쇼테이 카라쿠가 시타야 신사(시타야 이나리 신사) 경내에서 5일간 ‘요세’(만담공연)를 열었습니다. 라쿠고는 그 이전부터 있었지만, 일반인을 모아 공연한 적은 없었습니다. 이 일로 시타야 신사는 요세의 발상지로 알려졌습니다. 시키는 요세를 자주 찾았습니다. 나츠메 소세키와의 친분도 요세 다니는 취미에서 비롯되었습니다.
 
 寄席はねて上野の鐘の夜長哉 子規 (明治29年(1896))
  요세가 끝나고 우에노 종이 울리니 밤이 깊었구나 시키

모토미시마 신사(다이토구 네기시 1쵸메 7-11)

모토미시마 신사 안쪽에 있는 아사이 츄 가택을 방문했을 때의 시.
 
 木槿咲て繪師の家問ふ三嶋前 子規 (明治30年 (1897))
  무궁화가 피고 화가의 집을 묻는 미시마 앞 시키

네기시 초등학교 (다이토구 네기시 3쵸메 9-8)

네기시의 마을이라 불리던 네기시 인근은 당시에 논밭이 있고, 문인 화가들이 모여 살던 지역이었습니다. 꾀꼬리가 많아서 꾀꼬리 마을이라 불리던 곳에 지금은 네기시 소학교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雀より鶯多き根岸哉 子規 (明治26年(1893))
  참새보다 꾀꼬리가 많은 네기시구나 시키

  
다이토구에는 15개의 시키의 시비가 있습니다.
마사오카 시키 (국립 국회도서관 소장)
 

 마사오카 시키(본명 츠네노리, 1867-1902)는 게이오부터 메이지 시대를 살았던 하이쿠, 시인, 어학의 연구자입니다. 하이쿠와 단가를 비롯하여 수필, 소설, 신체시, 한시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활동하면서 일본 근대문학을 개척한 선구자입니다. 메이지 22년(1889)에 피를 토한 자신을 입이 붉은 이유로 울면서 피를 토한다고 일컬어지는 두견새에 비유하여 시키(자규: 두견새, 호토토기스)라 칭했습니다. 신문 기자로 재직하면서 메이지 30년(1897)에는 하이쿠 잡지 「호토토기스」를 창간하고 자신도 하이쿠를 읊으며 단가의 혁신을 시도하고 수필의 집필과 함께 요사 부손 등 앞선 문인들의 연구에도 힘써 근대 문학에 크게 공헌했습니다.
 시키암은 모친인 야에와 여동생 리츠와 함께 지내면서 34세 11개월의 생애를 마감한 거처입니다. 메이지 27년(1894) 2월에 이주한 셋집(구 가가번 마에다 가문의 별저 내)은 쇼와 20년(1945) 4월 제2차 세계대전의 공습으로 소실되었지만, 쇼와 25년(1950)에 사무카와 소코츠 등의 노력으로 거의 당시의 모습으로 복구되어 지금에 이릅니다. (다이토구 네기시 2-5-11)

 
 
 


 시키암은 JR 우구이스다니역 북쪽 출구에서 도보로 5분, 빌딩과 호텔이 밀집한 구역을 지나서 네기시 2쵸메에 있습니다. 시키는 이곳에 메이지 27년(1894)에 옮겨와 메이지 35년(1902) 9월 19일에 세상을 뜰 때까지 거주했습니다. 시키는 자신을 달제 책방 주인, 대나무 촌민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시키 사후에 여동생인 리츠가 이어서 모친인 야에와 함께 지냈습니다. 리츠 사후(1941)에는 문하생인 사무카와 소코츠가 시키암을 지켰습니다. 쇼와 25년(1950)에 재건되어 쇼와 27년(1952)에 도쿄도 지정사적이 되었습니다. 현재는 당시의 약 2배(405.6 제곱미터)의 면적이 되었습니다. 골목을 낀 건너편에는 메이지 27년(1894)에 시키를 만나 신문 「소일본」의 삽화를 담당한 이래 친구가 된 서양화가이자 서예가인 나카무라 후세츠의 옛 집터(서예 박물관)가 있습니다. 후세츠는 메이지 32년(1899)에 시키가 채색화를 그리고 싶다 하여 수채화 도구를 가져왔고, 시키는 이것으로 「과일첩」이나 「풀꽃첩」등의 작품을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그렸습니다.

 
 
 
 

 
 
 
 
 
 
 
 
 
 
 
 
 
 
 
 
 
 
 
 
 
 
 
 
 
 
 
 
 


우에노 공원 마사오카 시키 기념구장에 세워진 시비인 「봄바람이여 공을 던진 푸른 벌판」이 시키가 공을 던지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시키 거사 자화초상(메이지 33년(1900), 국립 국회도서관 소장)